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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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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탕, 김희영 할머니, 대물림, 장승희, 하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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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간 누구에게도 맡겨본 적이 없다는 하동관 국솥.
하동관 곰탕 맛의 최정점은 할머니 육감으로 이뤄진다.

40년간 동생들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출가해서 2년 되던 해부터 시어머니에게서 국솥을 대물림했다는 할머니는 직접 국솥을 책임진 것만 40년이 된다. 그동안 무쇠 솥 3개가 닳아 뚫어졌고, 장작과 유연탄, 19공탄, 석유 버너, 가스 등 한국의 연료변천사를 다 겪어왔다. 이제 하동관 곰탕만큼은 언제 어떤 조건에서든 제 맛을 살려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할머니는 9남매의 넷째로 태어나 서울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 마쳤다. 하지만, 하동관 국솥을 물려받은 이후 동창들은 물론, 다섯 동생들 결혼식조차 참석하지 못했다. 심지어 하나뿐인 딸의 대학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 성장해 어머니 곁에 나앉은 딸에게 ‘우리 어머니는 자식은 직원처럼, 직원은 자식처럼 여긴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40년 넘게 하동관과 내 집 외에는 발길 닿은 곳이 없다는 할머니는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며 처음으로 친정가족들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참으로 많은 것을 느꼈고, 그때 마음에 큰 변화를 받았다고 술회한다.
돌아오는 길에 마음을 완전히 비워 하동관의 직원과 손님들 모두를 내 가족처럼 하나로 껴안기로 마음을 정했고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다. 그래서 내 가족이 먹는 음식과 직원들이나 손님상에 내는 음식을 따로 구별해 만든 적이 없다. 어느 한쪽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모두를 하나로 마음에 껴안았다는 것이다.

직원이 20명에 이르지만, 처음 만날 때 관계를 확실하게 하고 나면 모든 것을 믿고 맡긴다. 간섭은 하지만 타협을 이뤄내고, 대신 대화를 많이 해야 하고 상대편 마음을 감싸는 습관이 생겼다. 젊었을 때는 깍쟁이 소리도 들었지만, 시어른 모시고 많은 손님들을 대하며 10년쯤 지나니까 본인도 몰라보게 달라지더라는 것이다. 가끔은 성공 비결이 뭐냐고 손님들이 묻는데, 할머니의 대답은 한결같다. 비법은 없고 살아온 발자취가 그렇듯 손님이나 직원들에 대한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대물림해준 시어머니의 유훈도 정직한 신뢰를 무척 강조했다. 42년간 바깥출입을 끊고 도를 닦듯 국솥을 지켜온 지난날의 삶이 오로지 정직한 신뢰의 실천이었다는 것이다. 시어른과 인연을 맻어 식자재를 대주는 이들이나 주방의 찬모와 홀의 젊은 직원들을 늘 가족같이 다독이고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이런 삶이 몸에 배어 말과 발걸음이 빨라지고 자주 들여다보는 것이 흠이라지만, 밝고 명랑한 분위기로 손님상에 내는 음식과 손님을 대하는 직원들의 표정이 더도 덜도 없이 늘 한결같기를 바라고 있다.

남들은 40년을 하루같이 꾸준하게 지탱해온 할머니의 타고난 집중력을 단조롭고 고생스럽게 여기겠지만, 할머니는 매일매일 새로운 맛에 도전하면 국솥에 쏟아붓는 나날을 신명처럼 여겨왔다. 그 결과가 오늘의 하동관 곰탕 맛이다. 30년을 근속해온 주방의 찬모 권혁녀(69세) 할머니는 30년 전에 만나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며 김 할머니의 수족역할을 해주고 있다.

누구에게도 맡겨본 적 없는 국솥, 외동딸이 지망

할머니에게 대물림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 한마디로 하동관 곰탕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하동관 곰탕은 체력이나 기술로 하는 것이 아니고 몸에 밴 일상의 습관처럼 모든 걸 다 바쳐야 할 수 있다고 말이다. 때문에 아직 누구에게 대물림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직 몸도 건강해 누구에게 맡길 만큼 힘들지도 않다고 말한다. 자리를 옮겨 앉았지만 이미 주방과 홀 어디나 몸에 익어 전혀 불편한 것 없이 한결같은 분위기로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다.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카운터에 나앉은 딸 승희(30세)씨의 모습이다.

장씨는 예고를 거쳐 대학에서 기악을 전공한 뒤, 신문사에 입사해 5년여간 몸담아 오다가 206년 말, 하동관의 다음 대를 잇기로 마음을 정하고 사직했다. 우연의 일치라기엔 너무도 공교롭게 어머니가 하동관 국솥을 물려받던 무렵과 같은 나이다.

장씨에게 어머니라는 존재는 졸업식 한 번 와준 적이 없었고, 몸에는 늘 탕 냄새가 밴 소박하지만 엄격한 분이었다. 그러나 막상 곁에 와서 지켜보면서 ‘아, 하동관이 이래서 그토록 유명한 곳으로 알려지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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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림을 지망한 딸 승희 씨와 할머니

본인과 가족에겐 엄격할 정도로 냉정하면서 직원과 손님들에겐 그토록 따뜻하다는 것이다. 또한, 하루하루 곰탕 냄새를 맡으며 하동관 밥을 먹고 하동관 식구로서 느끼는 또 한 가지는 하동관 곰탕과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 닮은 데 놀랐고 한편 자랑스럽다고도 이야기한다.

장씨의 생각을 눈치 챈 연로한 손님들 가운데에는 ‘너 이 맛변하면 나한테 혼나’하며 일침을 가하기도 하고,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주며 하동관의 지내온 옛 추억과 분위기들을 소상하게 알려주는 손님들도 있다. 그래서 장씨는 깊은 책임감을 느끼며 우선 손님들 곁으로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고, 국솥과 고객들 사이를 오가는 어머니의 모습에 시선을 놓지 않고 있다.

이제 할머니의 생각도 어느 정도는 기울고 있다. 나이는 어리지만, 시어머니를 닮아 마음그릇은 듬직하고, 아직은 어려 섬세한 감각은 다소 부족해도 배우겠다는 생각만큼은 확실한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북촌 할머니 3대로 이어진 서울 곰탕의 손맛을 역시 서울에서 태어난 외동딸이 대물림하게 된 셈이다.

book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소중한 손맛의 주인공들과 가깝게 지내온 맛 칼럼니스트 김순경이 소개하는 대물림 맛집과 우리 음식 이야기,
이 맛을 대대로 전하게 하라』

서울 반갓집 곰탕 맛을 그대로 살린 김희영 할머니의 하동관 곰탕, 김광자 할머니의 영암어란, 1929년에 문을 연 진주 천황식당 김정희 씨의 진주비빔밥 등 소박한 음식 상차림이지만 손님들이 대를 이어 찾아와 줄을 설 정도로 세상이 알아주는 우리 음식의 진수.

* “이 맛을 대대로 전하게 하라”에 실린 하동관 내용 중 일부 발췌.